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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전원 특강

Min Bae 2014. 8. 30. 15:05

연제 : "치과의사와 언어"

 

일시 : 2014.03.26 17:00~

장소 : 부산대학교 치과병원 강당

연자 : 배민 

(숭의여자고등학교 재직 중, 서울대 석사 인문의학 전공)

 

치과의사와 언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은 치과의사와 문학이라고 주제를 잡을까 고민하다가 제가 문학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문학을 거론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애매하게 언어를 주제로 했습니다. 주제를 이렇게 잡은 까닭은 사실은 제 석사 학위 전공, 특히 석사 논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석사 논문 주제는 전문직업성인데 좀 특이하게 전문직업성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통해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1950년대 한국의 전후 소설 중 손창섭의 잉여인간이라는 소설을 아시는가요? 저는 중학교때였던가 잘 기억은 안나는데 집에 한국 문학 전집이 있어서 우연히 그 전집에 있던 단편소설들을 읽다가 알게된 소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대학생이지만, 제가 가르치고 있는 고등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자신 만의 인격, 자신 만의 사고체계가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시기라고 봅니다. 이는 그만큼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지식과 만나고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사고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의미이지요. 물론 사람은 누구나 늙어서 죽을 때까지 모두가 불완전하며 모두 자신에 대해 알아나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제가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이 제 삶에 많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같습니다.

가장 제 학창시절에 기억에 남는 두개의 소설 중 하나가 바로 잉여인간이었습니다. 물론 그 땐 제가 나중에 치과대학에 가게될지는 몰랐죠. 하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인 서만기라는 인물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치과의사였습니다. 같이 일하는 간호사는 홍인숙이라는 여자 간호사 한명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치과위생사 뭐 그런 제도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치과의원은 친구인 봉우의 처가 소유하는 건물에 세들어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치과의사에 왜 매료되었느냐구요? 물론 그 때 저는 중학생이었고 1980년대였습니다. 지금처럼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때에도 막연히 치대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잘하고 싶어하는 학생이었죠. 지식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이 서만기라는 인물은 사실 매우 고전적인 인물형입니다. 심훈의 상록수라는 유명한 일제 시대 중편 소설을 아실 겁니다. 지식인의 사회적 헌신을 전형적으로 묘사한 소설이죠.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농촌 계몽운동, 이른바 브나로드 운동의 파도 속에서 훌륭한 지식인의 자기헌신적인 사회참여를 잘 묘사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서만기는 치과의사로서 잉여인간이라는 소설에 나오지만 실제 그의 본질은 일제 시대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지식인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서만기가 소설 속의 다른 인물과 가장 차별화되는 요소는 그가 지식인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것이 법학이든, 경제학이든 치의학이든, 지식의 내용이 다를 뿐이지 1950년대 당시 우리 사회에 지식의 공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 지식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소설 속 그의 의미가 규정되어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는 물론 전후의 가난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나고 있습니다. 특히나 손창섭이라는 작가는 잉여인간 소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주로 소외되고 병든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내용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은 작가입니다. 소설의 분위기는 그래서 결코 밝지 못합니다. 요즘의 위트 넘치고 재치 있는 대사와 흥미진진하고 독창적인 내러티브 등은 이 소설에서 기대하기 힘듭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흥미를 느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인물의 매력이었던 것같습니다. 별다른 스토리도 없고 분위기도 우울한 소설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 사회 속 인간 군상의 한 측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같습니다. 그 당시 나는 학생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보는 친구들의 모습과도 오버랩이 되었던 것이지요. 지식인과 그 주변인들.. 제게는 그런 구도로 그 소설이 당시에 읽혀졌습니다.

물론 1950년대와 1980년대는 달랐습니다. 1980년대는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가는 초중학생은 없었죠. 1980년대와 2014년 지금은 또 다를 것입니다. 지금은 대학 입학 정원이 고등학교 졸업 인원과 비슷한 시대에 와있습니다. 대학생은 지식인도 아니고 기본교육을 받는 정도의 단계로 인식되고 있으니까요.

 

미리 말해두지만 잉여인간 소설은 1950년대식 소설입니다. 또 사실 클래식에 들어갈 만한 대작은 아닙니다. 서만기의 헌신과 고민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가족, 주변인, 자신의 치과의원의 좁은 반경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은 1950년대를 넘어서 1980년대, 아니 2014년 지금에도 여전히 사람을 매료시키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식인이라는 관점으로 극중 인물을 해석했는데,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고정된 이미지, 상을 넘어서 생각해보죠.

치과의사는 지식을 인정받는 직업군 중 하나입니다. 사회에서 그처럼 전문지식을 인정받는 직업군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매우 늘어났죠. 특히 전문직업성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에 비추어보면 일반적인 직업은 그 구성원들의 집단적 전략에 따라 전문직업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는 가변성을 가지기도 합니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시장 소비자들의 서비스 구매력이 높아진 사회에서는 당연히 보다 많은 세밀하게 분화된 전문직업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전문직업성에서 가장 핵심적 요소 중 하나는 내인적인 요소가 아닌 외인적 요소입니다. 다름 아닌 사회적 인정이죠. 집단 내 구성원들 간에 전문직업이라고 아무리 내면화되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집단 내적인 자기만족으로서만 머물게 됩니다. 물론 자기 만족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지식에 대한 사회적 인정, 그리고 사회적 역할, 즉 사회적 성격에 국한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별로 그런 생각을 특별히 하고 살진 않을 겁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사회 자체가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지식 시장을 방대한 규모로 가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지식은 그저 하나의 상품일까요? 그저 배우고 익힌 만큼 생산성을 발휘하는 그런 것일까요? 사실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교수라고 하는 대표적인 현대의 지식인 집단 조차도 이제는 학문 내지 지식이 가지는 경제적 가치에 극도로 민감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걸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대학의 인문학과들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경제성 내지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학과의 위상이 매겨지고 더 나아가 사회적 활동도 그 시장 가치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보이는 사회적 겉모습의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치대를 다니는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는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물질이 풍족한 가운데 수준높은 정신적 결과물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 사회적 행복에 있어서 물질과 정신은 서로 깊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우위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한번 가만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물질적인 성공, 치과의사로서의 성공입니까? 성공이 행복감을 안겨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사실은 인간의 뇌가 추구하는 본성, 즉 욕구를 충족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생리적 기능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이러한 본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욕구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으며, 스트레스 반응에서 자유로운 인간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욕구와 스트레스는 모두 우리의 뇌가 인지(cognition)하는 과정과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이것을 생리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졸업장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에 담긴 의미가 우리에게 흥분을, 자부심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죠. 페라리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페라리가 내가 모는 차라는 사실이 초래하라는 성취감, 우월감과 같은 감정이 행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는 모두 결국 욕구와 스트레스의 변주가 만들어내는 뇌신경학적 결과일 뿐입니다. 행복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즉 그 사람에게 어떤 욕구가 존재하고 그 사람에게 어떠한 자극이 스트레스를 초래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이 행복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한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어떻게 정의하고, 자신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이기도 하죠.

제가 잉여인간의 서만기에게 매료되었던 것은 제가 지식에 대한 욕구, 성숙한 인격에 대한 욕구가 컸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부족하거나 무지한 상태에서 받는 스트레스, 빈약하고 졸렬한 인격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컸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어떠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어떠한 상황에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유난히 좋아하는 것, 자신이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잘 분석해보면, 즉 자신의 역사를 잘 해석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분명 물질적인 성공과 시장에서의 경쟁에 혈안이 된 사회같아 보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외적인 물질이나 경쟁에서의 우월감에 자신의 행복을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투영해서 그 물질적 성공 혹은 주변의 부러운 시선 자체가 행복인 듯이 보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엔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에 지나치게 자신의 행복을 투영하고 있는 이유는 지식에 대한 의미 부여를 적게 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지식은 인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많이 알게 될수록 자신이 이전에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더 겸손해지고 겸허해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많이 알게 될수록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더 넓고 깊어집니다. 즉 사람에 대해 편견과 오해, 자만에 빠지지 않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저 역시 치과대학을 다니는 동안 자연과학적인 언어에 매우 익숙했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제 인격과 그리 쉽게 관련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치대를 졸업하고 역사교육과에 편입해서 한동안 힘든 과정을 겪기도 했습니다. 문과적인 지식, 인문사회학적인 용어들이 낯설었고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중요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아무리 전문화되고 높은 사고력을 요하는 난이도 있는 앎이라 하더라도 철학적 바탕이 없으면 지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식은 인격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앞서서 지식인에 관해서 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그 때의 그 지식이라는 단어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어떤 앎이든 거기엔 철학적 바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를 알게 되었다면 이 것이 내 인생에 내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달리 아리스토테네스나 공자의 말씀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공부하는 것,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 것인지, 내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어떤 지식을 가졌든 지식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두에서 소개한 잉여인간 소설 속의 서만기가 지식인 캐릭터로서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물론 20세기 중반 한 줌을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막중한 역할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데서 연유하는 철학적 각성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서만기가 절 매료시켰던 것은 사실, 손창섭이라는 작가의 언어에 제가 매료된 것이었죠. 즉 손창섭은 자신의 소설이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던 작가였습니다. 그랬기에 그것이 그의 소설에 투영된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소설 속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철학이 반영된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활에서 언어를 통해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의 언어에 우리의 철학은 반영됩니다. 치과의사인 여러분의 언어에 여러분의 철학이 반영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치의학 수업 내용, 학문 내용을 통해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인생에,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혹은 가질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발견, 그런 철학은 여러분 일상의 언어에 반영되어 여러분의 인격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치과의사의 인격은 결국 치의학 지식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치의학 속의 학문적 내용 혹은 기술적 내용이 자신의 인생과 행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를 알고 있는 치과의사는 지식인으로서 지성인으로서 성숙한 인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빌딩을 가지고 페라리를 몰고 그런 것이 아닌, 아니 그런 것이 나쁘다거나 그런 것을 초월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나의 전공학문을 나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나만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의 언어로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없다면 결국 나중에 빌딩을 가지고 페라리를 몰아도 그것은 빌딩이 나를 가지고 페라리가 나를 모는 것과 구별할 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만의 언어로 , 나의 철학으로 치의학 더 나아가 어떤 학문이든 소화할 수 있게 되면 다른 전공,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들과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소통은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라 할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소통을 할 수 있으려면 서로 존중하는 기본 태도와 서로 이해하려는 기본 자세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언어가 나만의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나의 언어가 사회적 구속으로서의 일반 언어가 아닌 나만의 언어로 축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소통이 아니라 잡담이며, 주체가 불분명한 같은 얘기에 대한 맞장구, 즉 동어반복, 혹은 험담이나 비판에 대한 동조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만의 언어로 여러분의 자아를 세우고 이 사회에서 진정한 소통과 협력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2014 3 19일 배민이 작성함. (2014 3 26일 특강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