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opinion

월간숭의에 실린 서평 (역사교사의 서평) 2011. 07.15

Min Bae 2011. 7. 12. 13:12

 

역사교사의 서평 : 천진의 <하버드 경제학>

 

역사교사 배 민

 

이 책<하버드 경제학>의 한 챕터는 온전히 멘큐 교수의 강의를 담고 있다. 20대를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나에게 세상을 보던 시각을 전환하게 된 첫 단추를 제공한 책이 멘큐의 <경제학원론>이었기에 이 책의 표지에 멘큐 교수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책을 도저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책은 고등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뭐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을 읽는 고등학생들도 있으니 학생들에게 소개 못할 이유는 없다. 애당초 경제를 모르고 정의를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 책의 내용이 따르고 있는 경제와 사회에 대한 기본 골격을 우리나라에 대입해서 학생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보겠다. 내 역사적 지식을 가미해서.

 

먼저 우리나라 정서와 많이 다른 미국의 이야기를 좀 하자면 미국은 기업가들이 자유주의적 환경에서 국가 성장을 주도한 케이스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정서가 강한 (심지어 사회주의적 통제경제를 전세계에서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우리민족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정서가 틀리다. 옆에 중국과 일본이라는, 경제 규모가 우리보다 훨씬 덩치 큰 국가들과의 무역경쟁에서 힘들어하는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볼 때, 미국은 그 두 나라의 경제와도 수준이 다른 나라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특히 이 책을 보면 객관적으로 미국과 차이나는 우리나라의 정서가 비교적으로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현재 보편복지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데, 그 기저에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치며 사회적 불평등 해결을 위해서 정부가 나서고 사회제도가 바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주장은 사실은 가난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업가와 기업들을 그들이 성실하게 돈을 벌었건 아니건 간에 공공의 적 혹은 잘해봐야 정부에게 자신들 재산을 중과세로 아낌없이 털려야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글들의 맥락 속에 흐르고 있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시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음으로써, 자연히 기업에 대한 규제정책 혹은 온갖 종류의 시혜적 복지정책들을 마치 사회적 의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지지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의 청년이나 우리나라 청년이나 원하는 건 동일하다. 일부 모험적인 청년들의 창업은 논외로 하면, 쉽게 얘기해서 기업에 취직하는거다. 그것도 정규직으로. 따라서 기업 투자가 쉽고 고용이 활성화된 경제상황이 만들어져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국가의 청년들을 보면, 지금도 아프리카와 중동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년들이 비참한 불법이민자 신세를 감수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유럽으로 몰려가고 있다. 해외의 수많은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들이 이 사실을 배경으로 창작되고 있고. 중남미에서 미국으로도 마찬가지. 그들이 복지정책을 찾아서 떠나는걸까? 아니라는건, 일자리를 찾아서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참고로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빈층의 수는 전세계 인구의 20%에 해당한다. 거의 3만원 세대인 샘이다. 오늘날 자본과 노동시장에서 국가의 장벽은 낮아지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나라의 소위 88만원 세대들이 기피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처럼 귀족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편하게 살아가는게 정의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이라크 18살 청년이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다 죽을 때 우리나라 18살은 에어컨이 설치된 교실에서 덥다고 투정하는 현실은 중세 때보다 나아진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난 여기서 정의를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를 주장하면 의식있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시장을 통한 경쟁을 주장하면 이기적인 인간으로 몰리는 단순이분법적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복지 정책의 계속적인 확대가 초래될 것이다. 정치인들이 표를 잃어가면서 복지를 거부할 아무 이유가 없으니까. 적어도 당선되기 전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는 더 많은 정부지출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경제의 기본 주체 중에 가계나 기업과 달리, 정부는 스스로 이윤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므로 불가피하게 직간접적인 다양한 방식의 경제적 통제로 기업의 이윤을 (정치적 부담 때문에 가계의 소득을 건드리긴 힘드므로) 가져가려할 것이다. 그 통제의 정도가 심해지는 만큼 기업의 투자의욕과 생산능력은 저하되어 일자리 감소가 초래된다. 왜냐하면 보다 투자의욕과 생산능력이 높은 다른 나라의 다른 기업들에게 시장을 뺏기기 때문이다. 또 기업은 정부가 압박을 가한다고 순순히 당하지도 않으며 다른 방법으로 이윤을 빼돌리려고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경제적 선택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할 것이다. 사회적 감정에 편승한 정치적 개입은 기업과 가계의 경제활동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하여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고 무역 경쟁을 거부할 수도 없다. 자급자족 경제란 멘큐교수의 말대로 가장 빈곤한 경제이며, 실제로 중국산 저가 상품들이 주는 물가 안정의 이득, 또 무역으로 인한 각종 생활의 이기들을 우리나라 국민들이 포기할 리 만무하다.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소홀히 하고 있는 가치가 바로 “비용”이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은 다 누리고 싶어하면서 일자리 감소를 이유로 자유무역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내가 a라는 재화를 사면서 만족감을 얻을 때 b라는 기회비용을 지출하면서 다른 만족감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더 큰 문제들(정치적, 철학적)이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면 상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적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