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

역사교육과 단상..

Min Bae 2014. 8. 30. 15:21

역사교육과 단상..


배민 (서울 숭의여고 재직)


한 달 후면 영국 스코틀랜드의 St Andrews 대학에서 Modern History 박사과정을 시작합니다. 지난주 학교에선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이 제 유학 소식에 무척 놀라기도 하셨고 기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학교가 사립학교라 재단 이사회에서 휴직 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며칠을 긴장 속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행정 절차들, 제출 서류들.. 하루하루가 이런 저런 준비들 속에 금새 지나가버립니다.


며칠 전에는 박사과정 지원 추천서를 써주신 김민제 교수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교수님은 저를 앉히자 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박사과정 연구의 주제부터 최근 학문 동향과 영미권 교수들의 특성까지 정말 저에겐 버거울 정도의 소중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제 주위 분들이 참 저를 격려하고 힘을 주시는 모습에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과연 제가 그런 격려를 받을 만큼 열심히 살아왔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이 참에 교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반성해봅니다.


제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처음 교사를 시작한 학교는 전라남도 광주의 살레시오 여고입니다. 모래 운동장 대신 예쁜 잔디 운동장이 있는 그림 같은 수녀원 부설학교였습니다. 교장수녀님과 행정실장 수녀님은 연고도 없이 광주에 내려온 저를 불쌍히 여겨서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셨습니다. 교생실습 하면서 살짝 맛보았던 교사로서의 체험 때문에 다분히 환상에 젖어 시작한 교사 첫해였지만 학생들은 착하고 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뭘 모르는 새내기 교사에게 학생들이 많이 참고 봐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힘이 환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실은 피할 수 없지만 우리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결국 우리 자신의 머리 속 생각 혹은 마음이니까요.  


2년 뒤에 서울에 올라와서 일하기 시작한 곳이 지금의 학교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2년 동안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충분히 만끽했지만 한편으로 가르치는 일, 더 나아가 공부하는 일이 전에 몰랐던 제 진정한 적성이 아닐까 하는 자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일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평생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겐 저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어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대학원에 등록했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교육대학원에 다니지만 저는 제 편입 이전 전공을 살려서 의과대학 일반대학원을 다녔습니다. 의학사를 전공하게 되었죠. 다행히 서울대 대학원의 의학사 수업은 의사들이 주로 전공하는 연유로 수업이 야간에 있습니다. 본격적인 주경야독 생활의 시작이었죠. 하지만 서울에 막 올라왔을 때 마음 먹었던 것과 달리 저는 열심히 다니지 못했습니다. 연극에 심취해서 아마추어 극단에 들어가서 배우 훈련도 받고 연극동호회 활동, 교사 연극협회에 가입해서 어느 여름엔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전 직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치과 임상연수를 찾아 다니며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선 계속 진척이 없는 제 대학원 공부에 대한 걱정을 떨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억지로 논문을 쓰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굳이 서두르진 않았습니다. 의학과 인문학에 얽매이지 않고 정말 다양한 학문 서적들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제로 논문을 써볼까 고민하다가 오히려 논문 보다 더 생각이 미친 주제는 인간의 오해와 편견의 원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제 인식을 역으로 다듬어 글을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논문을 염두 해 두고 시작했지만 나중엔 조금 끄적거리던 논문은 방치한 채 제 생각을 한편의 책으로 내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책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지은 제목은 <우리 안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였습니다.


다음은 논문 차례였습니다. 제 생각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본 자신감 때문인지 이제는 홀가분하게 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읽은 적 있었던 손창섭의 <잉여인간>을 소재로 인문의학 (학교를 다니는 동안 석사 과정 전공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과거 치과의사로 살았던 경험 그리고 지금 교사를 하고 있는 제 현실 상황, 그리고 그간 생각해 왔던 것들을 바탕으로 즐거운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논문 심사위원 중 한 분이셨던 교수님은 학위 논문을 모처럼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다고 기분 좋은 평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석사 논문 주제와 달리 저는 전문가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광주에 있었을 때 들었던 생각, 즉 저만이 줄 수 있는, 기여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 생각들이 과연 얼마나 세상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 열정을 믿고 제 사고의 깊이를 믿고 싶지만, 그럼에도 저는 established academics가 아닌 제 fantasy 속에서만 활동하는 scholar였습니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제가 정말 테두리 지워진 하나의 영역 속에서 혼자만의 모래성을 쌓아놓고 행복에 도취해 있는 것이라면, 좀 실망스러울 수 있더라도 한번 실제 모습에 부딪혀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둘러친 울타리를 벗어나 멀리서 그 모래성(인지 정말 아름다운 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멀리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여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사람으로 돌아가서 환상을 갖고 이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을 할애해주신 최양규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역사교육과의 교수님들과 졸업동기들, 선후배님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역시 제 인생에 가장 순수하게 제가 하고 싶은 꿈을 찾아 처음으로 정해진 길을 뛰쳐나왔던 그 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니 제 인생에서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겠죠. 특히 편입한 첫 학기에 가게 되었던 강원도 답사는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떠오릅니다. 많은 좋은 사람들이 교정에서의 기억을 간직하고 이후 자신의 인생에서 꿈을 찾고 꿈을 이루고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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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동문회지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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